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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특별기고]

의료 기기, 제2의 반도체 산업이 되려면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 단장 김법민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 단장 김법민

의료 기기 산업을 흔히 반도체 산업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 의료 기기 시장 규모가 반도체 시장 규모의 86%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기준 2021년 의료 기기 생산액은 12조8000억원으로 반도체 생산액의 6%에 불과한 현 상황에서 두 산업의 비교는 언감생심, 당연히 과해 보인다. 그럼에도 최근의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급격한 고령화 및 인구 감소, 기후변화 등 인류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위험을 마주한 상황에서 의료 기기를 포함한 바이오헬스 분야가 제2의 반도체가 돼야 한다는 명제는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닌 국가의 미래가 달린, 필수적인 요구 사항에 더 가깝다.

일반적으로 혁신적인 의료 기기 기술이 개발된 후 임상 현장에서 활용되기까지 20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다. 건강과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의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관계로 매우 보수적인 특성이 있으며, 기존의 다국적 기업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의료 기기 산업을 제2의 반도체 산업으로 키우려면 산업 특성과 우리의 강점을 직시한 효과적인 중장기적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

4월 4일 정부가 제1차 의료기기산업육성지원종합계획을 발표했다. 2023년부터 5년간의 청사진을 담았다. 정부의 육성 계획이 왜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의료 기기 산업이 대표적인 규제 산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비스 공급자와 수혜자와는 별도로 우리나라의 경우 주요 비용 지불 주체가 국가인 매우 특이한 형태의 산업군이기에 정부의 정책적인 배려 및 육성 전략이 산업 생태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번 종합계획 내용을 요약해 보면, 우선 새롭게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혁신적인 의료 기기의 혜택이 전 국민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규제 합리화,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수출 지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개발(R&D) 강화 및 인력 양성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산업계에서는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공존하는 분위기다. 우선 대규모 재정 지원과 관련한 청사진이 뚜렷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국민 건강과 미래 첨단산업을 견인하는 의료 기기 수출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지만 반도체 산업 같은 수백조원 단위의 민간 투자 유도, 3305만㎡(약 1000만 평) 이상의 국가첨단산업단지 조성 등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과거의 중장기 전략과 비교해볼 때 의료 기기 산업에 대한 정부 당국의 이해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는 인상이다.

의료기기 의료현장 도입체계 변경(안)

좋은 기술 사장되지 않도록 해야

팬데믹 상황에서 스타 품목으로 떠오른 체외 진단 기기를 포함해 영상 진단 기기, 치과 의료 기기, 인공지능(AI) 의료 기기, 로봇 등 우리가 강점이 있는 다양한 품목군에 대한 집중 지원은 당연해 보인다. 주목할 점은 이런 국가 R&D를 주도할 거버넌스가 재단법인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의 2기 사업 형태로 제시된 점이다. 높아지고 있는 규제에 대비해 적절한 비즈니스 모델 및 개별 시장에 대한 정확한 분석 없이는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사장되기 일쑤다. 현 사업단의 주요 미션이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산업화 전 주기 지원인 이유다. 미국 NIH, 일본 AMED, 싱가포르 A-STAR 등 선진국에서 왜 의료 기기 R&D에 특화된 기구를 별도로 세우는지 다시 한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과제 선정 후 탈 없이 마무리되기만을 바라는 이전의 형태로 돌아가서는 안 될 일이다.

산업계에서 계속 요청해 온 규제 혁신 관련 중요한 내용이 포함된 점은 눈에 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이후 식약처)의 인허가 이후 위해도가 낮은 혁신적 의료 기기를 대상으로 시장 선진입이 가능하게 한 통합심사제도나 신의료기술평가유예제도 등에 대한 확대 운용을 검토하겠다는 내용, 신의료 기술을 사용한 의료 기기를 식약처 허가를 근거로 시장 선진입이 가능하도록 검토한다는 것이 매우 긍정적이다. 산업계의 오랜 요청 사항이고 임팩트가 큰 사안으로, 검토를 넘어 가급적 이른 시일 내 현실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혁신 급여 도입안도 제시됐는데 이전 정부부터 논의된 바 있으나 부디 검토 수준을 넘어 실질적인 지원 방안으로 정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만 규제 효율화 방안의 적용 대상은 위해도가 낮고 식약처 인허가를 득한 품목에 한정되며 추후 대상 품목을 확대하겠다는 언급 정도만 있어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을 시급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 특히 3, 4등급 위해도가 높은 의료 기기 품목군의 부가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은 상식이며 궁극적으로는 ‘확증임상시험’을 통해 식약처 허가를 얻은 품목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주요 산업 시장 규모

원격진료 전향적 접근 시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불법이고 20년간 시범 사업만 줄기차게 해온 원격진료, 역시 이번에도 원격 협진, 원격 모니터링 등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 종합계획에 포함됐다. 고령화와 소외 지역 증가에 따라 비대면 의료, 나아가서 원격진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디지털 헬스 기술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웨어러블 장비를 이용해 개인 데이터를 모으고 바이오 빅데이터, K-CURE 등을 통해 정밀 의료 기술을 혁신하더라도 원격진료가 정착되지 않으면 국민에 대한 서비스 향상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디지털 헬스 분야의 중요성은 예상대로 매우 강조됐다. 디지털 헬스 분야에서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AI 진단 보조, 디지털 치료 기기, 비대면 진료를 포함한 기술이 포함됐으며, 전 세계적으로 아직 시장을 장악한 빅테크 기업이 없는 태동기에 있는 산업군으로 분류되기에 우리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대화형 생성AI인 챗GPT 예에서 보듯이 데이터가 방대해지고 이들을 이용한 학습 방법이 진화함에 따라 디지털 헬스를 포함한 의료 기기 분야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아마존의 원메디컬(One Medical) 인수, 마이크로소프트(MS)의 뉘앙스 커뮤니케이션즈(Nuance Communications) 인수 등 예를 보면 온라인 거대 기업을 중심으로 디지털 헬스 기술이 클러스터화하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단순한 건강관리를 넘어서 의료 서비스 또는 임상 현장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이다. 디지털 치료 기기 등 다양한 디지털 헬스 기술이 기존 의료 기기 산업 대비 시장 진출이 용이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다양한 AI 기술, 디지털 진단 및 치료 기술 등까지 포괄하는 디지털 헬스 공룡 기업의 탄생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늦으면 늦을수록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은 빠르게 높아져 간다.

국제 정세 변화에 따른 공급망 교란으로 인해 산업 전반에 있어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훨씬 많다.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이 국민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의료 기기 산업은 손놓고 있을 수 없는 핵심 산업군이다. 이번 종합계획에 담긴 중요한 제안이 이른 시일 안에 현실화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